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과거 제도 (문단 편집) ===== 소과 ===== 소과에서 진사를 뽑는 시험 진사시와 생원을 뽑는 시험 생원시가 따로 있었는데, 고려시대의 제술과의 후신이 진사시, 명경과의 후신이 생원시라고 보면 된다. 현재로 치자면 [[공직적격성평가]]에 해당된다.[* 실제로 공직적격성평가는 사고력과 언어 능력을 본다.] '''생원과'''는 [[사서오경]]에 대한 지식을 시험하고, '''진사'''과는 [[시]]나 부로 문예창작 능력을 시험하며, 각각 통과하면 생원이나 진사라는 칭호를 받는다. 쉽게 말해 각각 [[경전]] 이해력 시험과 문장력 시험인 셈이다. 생원과는 고려시대의 명경과, 진사과는 제술과를 계승한 셈.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서 경전에 대한 암기보다 문장능력이 더욱 중시되었고, 이 때문에 생원보다 진사가 존경받게 되었다. 진사와 생원별로 1차시험인 초시는 한성시에서 200명, 지방의 향시에서 500명을 뽑아 각각 700명을 선발했으며 각 지방별로 인구비율에 따라 합격자 수를 분배했다. 현대의 지역인재전형으로 볼 수도 있다. 초시 합격자를 모아 2차시험인 복시를 통해 다시 각각 100명을 선발해 그 진사와 생원 합 200명을 소과 합격자라 불렀다. 2차 복시 합격은 당연히 지역 안배 없이 실력으로 200명을 선발했다. 합격자들은 길일을 택하여 [[생원]]은 동쪽에, [[진사]]는 서쪽에 서서 국왕에게 절을 올린 뒤에 합격증서로서 백패와 주과(酒果)를 받았다. 초시에 합격하면 종9품을 받고 하급 관리가 될 기회가 주어지거나 [[성균관]]에 입학할 기회가 주어지는데, 하급 관리로 시작하면 디메리트가 엄청 컸기에[* 일단 병과로 합격한다고 해도 정9품이 주어지는데, 이 두 계급의 차이는 2년이나 되었기에 경쟁에 불리했다. 게다가 중앙인 경우는 과거로 선발한 사람을 우선적으로 채용했기에 이 루트로 시작한 사람은 지방의 말단에서만 계속 왔다갔다하다가 은퇴하는 결말이 오는 경우가 많았다. 지금으로 치자면 도청이나 시청, 혹은 중앙행정기관에 들어가지 못하고 행정복지센터 등지만 전전하면서 7~8급으로 은퇴하는 격이라고 봐도 무방했던 셈.] 대부분 [[성균관]]에 입학했다. 그래야 서울에서만 치뤄지는 비정기 과거 시험이나 성균관 유생들만을 위한 특별시험에 응시가 가능해서 쉽게 정계에 올라갈 수 있었기 때문. 다만 현재로 치자면 [[고위공무원단]]에 해당되는 당상관은 과거 응시가 금지되었다. 당상관은 대부(大夫) 반열에 들었기 때문에 사족(士族) 지식인을 위한 시험을 칠 이유가 없다는게 공식적인 명분이었고, 실질적으로는 별도의 직급체계를 가져 품계가 상당히 높게 잡히는 종친·외척·부마 등을 겨냥한 것이다. 사실 현재도 [[고위공무원단]]이 굳이 응시하지 않는 것처럼, 굳이 당상관이 과거 제도에 응시할 명분이 없기도 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